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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라느 것은 그 신화가 살아 있던 시대보다 훨씬 더 지나서야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록은 일종의 정리이기 때문에 정리 과정에서 아무래도 원형을 잃고 만다. 우리는 우선 첫째로 왜 신화를 기록할 필요가 생겨났는지, 그 시대적인 배경, 특히 정치 정세를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서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본의 신화는 왕실 및 국가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 고대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이것을 8세기 초반에 집성된 '허구의 신화'라고 단정했는데, 그 때문에 물의를 일으켜 대학에서 쫓겨났다. 신화가 기록되었을 시기는 왕실과 국가의 기원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 시대였다는 말이 된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구성되었기 때문에 앞뒤가 아주 잘 들어맞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이 기록된 뒤, 정권은 여기저기로 바뀌긴 했지만, 전부 왕실권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건국을 설명한 신화를 변경할 필요는 없었다. 지역적으로도 제2, 제3의 정권이 동시에 존재할 여유가 없었다.
이에 비해서 중국의 신화는 앞뒤가 맞지 않고, 같은 종류의 것이 중복되기도 하는 등, 단편적인 것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체계가 결여된 신화라는 것이다.
중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각지에 정권이 동시에 병릭하여 각각의 건국신화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역 정권들은 끊임없이 흥망을 거듭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신화는 함몰되어 버린다. 어떤 이유에선지 함몰을 면한 일부가 세상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신화는 역사를 반영한 부분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전체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단편적인 반영이다. 어떤 의도에 따라 허구로 조작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화에서 역사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고고학상의 발견은 극히 구체적인 역사 그 자체의 흔적이다. 그러나 흔적은 흔적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역사 전체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허구로 조작한다고 말했지만, 그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역사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예를 들어서, 일본의 신화가 기록된 것은 국가의 통일이 어느 정도 이뤄져서, 그것을 더욱 강화할 필요를 느낀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8세기에 접어든 뒤였기 때문에 허구에 의한 조작의 조직성이 높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중국의 신화는 일본의 그것처럼 국가 신화는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중국에 국가 신화가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그것은 넘쳐 날 정도로 많았을 테지만, 국가 신화란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는 법이다.
중국에 통일국가가 출현했을 무렵에는 이미 제자백가의 시대가 지나고, 진화는 제가의 경전 속으로 흡수되어 있었다. 경전의 사상의 전개와 그 설득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국가의 기원을 서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국의 신화에 국가 신화적 성격이 희박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경전은 딱딱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갇혀 버린 신화는 생기를 잃기 쉽다. 화석화되어 버렸다는 평도 반드시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똑같이 갇혀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초사 등과 같은 문학적 작품 속으로 들어간 신화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