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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곧 역사는 아니다.
옛날부터 중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삼황오제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할 때 오제본기에서부터 시작했다. 삼황을 삭제해 버렸다. 그것을 역사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오제는 황제, 제 전욱, 제 곡, 요, 순을 각각 말한다. 사마천은 황제부터 이야기를 풀어 가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제본기의 말미에서,
오래전부터 많은 학자들이 오제를 칭송해왔다. 그런데 유독 상서는 요 이후를 실었을 뿐이다. 그리고 백가가 황제를 이야기한 글은 아순하지 않다. 천신, 선생은 이것을 말하기를 꺼린다.
라고 기록했다. 기원전 2세기라는 사마천의 시대에서조차 이치를 아는 정상적인 사람들은 황제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황제에 대해 기록된 것은 많지만 황당무계한 사실들이 많아, 그것을 전부 사실로 다룰 수는 없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마천이 당시 지식인들처럼 덮어놓고 황제를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춘추, 국어를 보건대, 그것은 오재덕, 제계성을 발명했음이 분명하다. 생각건대, 단지 깊이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나타낸 바가 전부 거짓은 아니다.
라고 그는 쓰고 있다. 오제덕은 공자가어 속의 한 편이며, 제계성은 대대례 속의 한 편이다. 그 안에 황제에 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유학자들은 이것을 정경이 아니라고 판단, 연구하여 전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마천은 춘추나 국어와 같은 초일급 정경 속에 앞에서 이야기한 두 편의 기술이 인용, 혹은 참고되었음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학자들이 그 두 편을 무시하려 하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깊이 생각해보면,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전부 허구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사마천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 말의 가장 우아한 것을 골라 특별히 기술하여 본기를 시작하는 글로 삼았다.
이런 말로 오제본기를 맺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많지만, 그것을 체로 걸러서 일단 온당한 것이라 여겨지는 것만을 골라 사기의 권두에 두게 된 여유를 밝혔다. 사마천은 신화와 역사 사이에 황제를 두고, 거기에 역사의 '반시민권'을 부여하려 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황제라는 명칭에서 오행설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황제를 고대사상의 실존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무 천황을 신존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황제는 전설상의 인물에 지나지 않지만, 거기에는 고대 제왕 중 누군가가, 그것도 복수의 누군가가 투영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마천은 그런 의미에서 황제에게 역사 세계의 반시민권을 부여했을 것이다. 일본의 진무 천황은 실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야마토 왕조의 조상중에 진무 천황에 투영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부정할 수 없지 않을까?
오제 다음으로 하, 은이라는 왕조가 이어진다. 역사책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이 두왕조도 한동안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 왔다.
사마천은 사기 속에 은 왕조 제오아들의 계보를 나열해 놓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은 신화시대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은이라 불리는 왕조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도 사마천이 기술한 제왕의 계보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1899년부터 복점에 쓰였던 갑골문자의 단편들이 출토되고, 그에 이어서 은허가 불굴 조사되면서 사기에 실린 은 왕조의 제왕들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은 왕조가 신화에서 역사로 자리를 옮긴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실존을 부정했기 때문에 '말살박사'라고 불렸던 학자들이 일본에 있었따. 중국에도 그런 부류의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의고파라고 불린다. 학문을 하는 자세로서 이것은 평가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의 시대에서조차 실존인물이라 믿어지지 않았던 황제를 전부 허구라고 말할 수 없다고 보고, 사기의 권두에 그 사실을 적었다. 맹종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자세는 일종의 의고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