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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긴 시간은 주관적 표상들이면서도 모든 직관의, 그러니까 감관에 의한 직관뿐만 아니라 상상력에 의한 직관의 기초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인 표상들이 일정한 직관을 직관이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공간 시간은 직관의 형식으로서 경험적으로 감관에 의해서든 상상력에 의해서든 직관된 것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직관된 것,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공간 시간은 직관의 형식으로서 모든 감각작용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상상력의 작용에서도 그 기초에 놓여 있다.
개별적인 잡다한 감각 인상들, 감각 자료들은 공간 시간 표상에서, 다시 말해 공간 시간적으로 일정한 관계에서 정리되어 수용되고, 따라서 양적으로 규정된다. 이같이 될 때만 '동일한 사물', '두 사물', '모든 사물'과 같은 개념들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런 조건 아래에서만 칸트적 의미에서의 순수 개념인 양, 곧 '하나', '여럿', '모두'라는개념들이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주관적 표상들인 공간 시간은 직관의 형식이자 동시에 "직관에서의 결합의 형식이고, 범주들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일에 봉사한다". 감각 인상들은 잡다하고 "거칠고 뒤엉켜 있는 채 이지만, 그것들은 이미 "직관에서의 결합의 형식"에 따라서, 다시 말해 공간 시간적으로 "일정한 관계"에서 정리되어 수용된다.
직관에서의 결합의 형식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공간 시간은, 그 자신 "잡다를 함유하는" 직관으로서, 각기 하나로 표상되어 있어야만 한다. 감성의 한 기능으로서 상상력은 공간 시간이라는 표상의 잡다를 산출한다. 그러나 "감성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지성의 한 기능인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은 공간 시간 표상이 각기 '하나임"을 가능하게 한다. 그 덕택에 전체로서 하나의 공간이라는 표상과 전체로서의 하나의 시간이라는 표상이 가능하다. 양적인 것으로서 공간 시간 표상은 각기 "그것의 부분들이 모두 동종적인 구성체이기는 하지만, 비로소 그것의 부분들로부터 성립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안에 무한 양의 동질적인 부분들을 함유하는 전체로서 표상되는 일종의 연속체이다.
이를테면 공간 시간은 연속량들이다. 이를테면 한 공간 또는 한 시간이라는 표상은 그에 따라 잡다가 주어지는 직관의 순전한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직관의 순전한 형식 이상의 것, 곧 감성의 형식에 따라 주어진 잡다의 하나의 직관적인 표상으로의 총괄을 내용으로 갖는다. 바로 이 '직관적인 표상'을 칸트는 '직관의 형식'과 비견하여 '형식적인 직관'이라고 명명한다. 여기서 형식적 직관은 더 이상' 형식적으로 직관도니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곧 형식을 주는 그래서 통일적인 직관함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