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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학자들 중에는 은을 하와 한데 묶어서 가공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은허의 발굴로 인해 은나라는 드디어 역사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의 동양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나치스에 의해 학살된 마스페로가 고대 중국을 저술한 때는 은허를 처음으로 발굴하기 1년 전인 1927년이었는데, 은을 역사 시대의 시작으로 봤으니 과연 형안이라 할 수 있다.
은이라고 말하지만 은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상'이라고 불렀다. 시조인 설이 하남성의 상이라는 나라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원전 13세기, 반경이 왕이었던 시절에 하남성 안양에 해당하는 은이라는 땅으로 천도했다. 그 이후로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270여년 동안 은이라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중국에서는 '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갑골문 속에 '상'이라는 글자는 있지만 '은'이라는 글자는 없다. 자신들이 부르는 것이 상이고 은은 다른 사람들이 부른 것이라면 상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그러나 사마천의 사기 이후 은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은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듯하다.
하를 멸망시키고 그것을 은이 대신했다는 것은 중원 정권의 경우이고, 제후로서의 은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은의 시조인 설은 우를 보좌하여 치수공사에서 공적을 세웠다고 한다.
요가 제위에 있고 순이 섭정을 하던 때 우는 사공에 임명되었고, 설은 사도에 임명되었다고 [사기]의 [오제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사공은 토지와 민정을 담당하는 대신이며, 사도는 문교를 담당하는 대신이었다. 하와 은의 시조는 동료였다. 물론 이것은 전승에 지나지 않는다.
전승 가운데서도 설의 탄생에 얽인 전승에는 흥미진진한 부분이 있다.
설의 어머니는 이름을 간적이라고 하는데 유융씨의 딸이었다. 그리고 제곡의 둘째 왕후였다. 제곡은 앞에서 말한 대로 황제의 증손자로 오제 중 한 사람인데 순과 같은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간적은 세 사람이서 목욕을 하다가 현조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현조란 제비를 말한다. 간적이 그 알을 먹고 임신을 해서 낳은 것이 설이라고 전해진다.
은은 틀림없이 새를 토템으로 한느 부족이었을 것이다. 난생설화는 각지에 있지만 퉁구스족 등 동방 민족에게 많은데, 그것을 근거로 은의 동방기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의 걸을 멸망시키고 은을 중원정권으로 삼은 탕은 설에서부터 헤아려 14대에 해당한다. 제후로서 지방정권이었던 시대의 은에게도 역시 쇠퇴한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중흥의 시대도 있었다.
중흥을 시킨 사람은 상갑으로 [사기]에 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해당하며 설에서부터 헤아려 8대째가 된다.
나중에 천하를 손에 넣었기 때문에 은은 제후시대의 전승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다. 은과 비슷한 정도의 제후가 여럿 존재했을 테지만, 중원 정권으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전성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특히 은나라는 문자를 만들어 냈다. 갑골에 새겨진 문자로 은은 자신들의 기록을 남겼다. 중흥의 아버지인 상갑의 일까지 알고 있었는데, 그를 제사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갑골이란 귀갑수골이라는 의미다. 거북의 껍데기나 동물의 뼈를 구워서 거기에 금이 간 것을 보고 점을 쳤다. 용산 문화 유적에서 이미 점을 칠 때 사용한 동물의 뼈가 발견되었다. 그것으로 은보다 앞선 시대에서부터 뼈를 구워 길흉을 점쳤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용산에서 출토된 동물의 뼈에는 문자가 새겨져 있지 않았다. 새기고 싶어도 아직 문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