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긴 시간은 주관적 표상들이면서도 모든 직관의, 그러니까 감관에 의한 직관뿐만 아니라 상상력에 의한 직관의 기초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인 표상들이 일정한 직관을 직관이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공간 시간은 직관의 형식으로서 경험적으로 감관에 의해서든 상상력에 의해서든 직관된 것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직관된 것,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공간 시간은 직관의 형식으로서 모든 감각작용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상상력의 작용에서도 그 기초에 놓여 있다. 개별적인 잡다한 감각 인상들, 감각 자료들은 공간 시간 표상에서, 다시 말해 공간 시간적으로 일정한 관계에서 정리되어 수용되고, 따라서 양적으로 규정된다. 이같이 될 때만 '동일한 사물', '두 사물', '모든 사물'과 같은 개념들..
나는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의 초대소에 있는 포도나무 시렁 밑에서 깊은 생각에 자주 빠졌다. 투루판 분지는 해발이 -154미터로 절구 바닥처럼 생긴 곳인데, 당연히 여름에는 더위가 혹독하다. 날마다 40도가 넘지만 반지하식 방이나 포도나무 시렁 밑에서라면 그 무더위를 얼마간은 피할 수 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1년 내내 건조하기 때문에 무덥기는 해도 끈적끈적한 느낌은 없다. 이와 같은 지방에서는 지하에서 발굴되는 문물도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7세기 전반에 멸망한 고창국 귀족의 무덤이 지금의 투루판 성에서 서쪽으로 약 48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아스타나라고 불린다. 20세기 초반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예를 들어서 오렐 스타인이 발굴한 문물은 영국과 인도로 옮겨져 그곳..
오제 앞의 삼황은 사마천도 그것을 역사로 인정할 수 없었던 듯 언급을 피했다. 사기의 이본 중에는 삼황본기부터 시작되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사마천이 쓴 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사마정이 보충한 부분이다. 같은 성을 쓰는 친족이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쓸데없는 짓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마정은 포희, 여왜, 신농을 삼황이라 하고, 그 외에도 천황, 지황, 인황을 일컫는다는 설도 소개를 했다. 포희는 복희를 말하는 것인 듯한데, 삼황에는 아직 이설이 있어 여왜 대신 축융을 넣은 것, 수인을 넣은 것, 심지어는 황제를 넣은 것조차 있다. 이설이 많다는 점도 신화시대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삼황오제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마천도 삼황보다는 오제 쪽이..
신화가 곧 역사는 아니다. 옛날부터 중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삼황오제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할 때 오제본기에서부터 시작했다. 삼황을 삭제해 버렸다. 그것을 역사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오제는 황제, 제 전욱, 제 곡, 요, 순을 각각 말한다. 사마천은 황제부터 이야기를 풀어 가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제본기의 말미에서, 오래전부터 많은 학자들이 오제를 칭송해왔다. 그런데 유독 상서는 요 이후를 실었을 뿐이다. 그리고 백가가 황제를 이야기한 글은 아순하지 않다. 천신, 선생은 이것을 말하기를 꺼린다. 라고 기록했다. 기원전 2세기라는 사마천의 시대에서조차 이치를 아는 정상적인 사람들은 황제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황제에 대해 기록된 것은 많지만 ..